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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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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였던 1937년, 중국공산당의 다민족 항일 부대 동북항일연군 90여 명과 한국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 80여 명 등 약 170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 주재소(지금의 파출소)를 기습 공격하여 일시 점령 했다 퇴각한 사건이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 연구되고 있다.
2. 배경[편집]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군 6사 사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3] 김일성이 장백현에 6사 조직과장 권영벽을 정치공작원으로 파견한 것은 같은 해 9월이었다. 갑산군에서는 1935년부터 공작이 시작되었는데 이 지역의 적색농업조합 활동에 참여하던 박달은 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달과 김일성의 연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4] 한편 김일성은 권영벽과 장증렬 등 요지로 파견한 공작원들로 하여금 중공 동만특위 장백현 정치공작위원회를 조직하게 했는데 권영벽이 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재만조선인조국광복회’ 공작위원회와 당세포, 생산유격대 조직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5]
1937년 3월에 열린 장백현 서강양목정자회의는 압록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제4사와 6사·2사가 합동으로 전개하기로 한 이 진공작전에서 유일한 한인 단위부대장으로서 장백근거지를 건설한 김일성이 작전의 주도권을 잡았다.
동북항일연군 6사는 장백현 쪽에서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을 공격하고 나중에 2·4·6사는 백두산 서남쪽의 간삼봉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 시기에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진출하여 일경의 주재소를 파괴한 제4사의 활동은 ‘최현’의 활약으로 알려져 최현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김일성을 국내외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밤부터 전개되었다.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국내 진입에 ‘조선민족해방동맹’ 지부 조직이 호응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무산으로 진출한 최현의 4사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국내 진공과 4사 지원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거점으로 보천보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3. 결과[편집]
습격자들은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한 보천보 주재소를 공격했다. 동북항일연군 90여 명, 내응한 국내의 재만한인조국광복회원 80여 명 등 항일세력 170여 명이 동원되었다.
습격 당시 주재소에는 일제 경찰은 셋, 조선인 보조원이 둘 있었다. 170여 명이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멀리서부터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진격하는 바람에 상황을 파악한 주재소 내 5명 모두 도주에 성공했다. 결국 순사의 딸인 2살배기 여아 1명과 주재소의 일본인 민간 요리사 1명이 유탄(빗나간 탄환)에 맞아 죽고[6] 공격 후에 주재원 5명의 무장(소총 5정, 총탄 수백 발)을 탈취했다.
목적 자체가 선전에 있었던 만큼 전술 면에서 큰 성과는 없었으며 보천보 점령 후 토벌군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허둥지둥 보천보를 빠져나갔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다음 날 경찰대가 추격하는 중 교전하여 일본 측은 사망자 7명, 부상자 14명이 발생했으나 동북항일연군 측 피해자는 수십 명이었다.
전투를 마치고 철수하던 동북항일연군 6사는 추격 일본군 부대와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힌 후 장백현의 밀영을 거쳐 2사, 4사와 합류하여 간삼봉에 도착했다. 큰 충격에 빠진 일본군은 조선인 김인욱 소좌가 지휘하는 함흥 제74연대를 출동시켜 추격하도록 하였는데 동북항일연군 3개사 연합군은 간삼봉에서의 교전을 통해 6월 30일 이 부대의 추격을 저지했다. (간삼봉 전투)[7]
일본군은 보천보 전투의 결과에 매우 놀라 그 다음해부터 동북항일연군에 대해 대토벌작전을 벌였다. 1939년부터 일본군, 만주군 등 70여만 명을 동원하여 토벌에 나서고[8] 그 결과 동북항일연군은 이 작전으로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고 김일성을 비롯한 생존 병력들은 그해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소련 영역으로 탈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종료되었다.[9] 보천보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조국광복회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검거에 나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었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혜산사건) 와다 하루키의 북한 현대사
4. 의의[편집]
훗날 6.25 전쟁으로 한국을 침략하면서 보여준 김일성의 성향과 상당히 비슷한 면이 이 전투에서 나왔다.
국경의 작은 읍인 보천보 습격 자체는 커다란 군사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혜산에서 2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변경으로 이곳을 습격한다는 것은 상당한 선전 효과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학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평가에 따르면 빨치산 부대로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10] 즉, 실질적 군공 거리는 전혀 없으면서 명성은 비교적 크게 얻을 수 있어 가성비가 좋은 곳이다.
한반도 내에서 무장 독립운동의 명맥은 이미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거의 끊어졌고 만주 지역의 항일세력도 자유시 참변과 만주사변 등을 거치면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난 1937년경쯤 되면 만주지역 조선인 항일세력이 사실상 소멸하고 30년 가까운 일제의 식민지배는 매우 견고해 일제가 상당히 기세를 높이고 이 때문에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도 조금씩 패배감과 비관주의가 감도는 시점이었다. 1937년 4월 말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재유가 검거되자 조선총독부는 "이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은 사라졌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즉 그러한 상황에서 이 사건이 터졌고 그 파급력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는 것.
이 전투는 한반도의 끄트머리를 조선인 항일세력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알려 일제의 지배력이 완벽하지 않음을 드러내 다른 여러 독립군 세력과 조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공을 세웠고 당시 상황에서는 이런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라도 큰 의미가 부여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간삼봉 전투 등 이후의 반응이 이 사건이 큰 의미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후에도 김일성을 토벌하려고 여러 차례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의 한국사 교육에서도 국내를 침투한 전투라며 의의를 언급하고 넘어간다.
김일성 본인 역시 보천보 전투에 대해 군사적 성과보다는 정치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즉, 아래의 과대 왜곡과 달리 보천보 전투 자체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는 주장은 90년대에 직접 부인하였고 '작은 싸움'이라고 자서전에서 인정했다.보천보전투는 대포도 비행기도 땅크도 없이 진행한 자그마한 싸움이였다. 보총과 기관총에 선동연설이 배합된 평범한 습격전투였다. 사상자도 많지 않았다. 우리측으로 볼 때에도 전사자는 없었다.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진행된 기습전이여서 어떤 대원들은 오히려 아쉬워할 지경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유격전의 요구를 최상의 수준에서 구현한 전투였다. 전투목표의 설정과 시간의 선택, 불의의 공격, 방화를 통한 충격적인 선동, 활발한 선전활동의 배합 등 모든 과정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립체적으로 맞물린 빈틈없는 작전이였다.
전쟁이나 전투의 가치는 군사적의의에 의해서만 규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정치적의의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어렵지 않게 리해하리라고 믿는다. 이런 리치로 볼 때 우리는 대단히 큰 싸움을 치르었다고 말할수 있다.
보천보전투는 조선과 만주대륙에서 아세아의 제왕처럼 행세하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보기 좋게 후려친 통쾌한 전투였다. 인민혁명군은 조선총독부당국이 치안유지가 잘된다고 장담하던 국내에 들어가 한개 면소재지의 통치기관들을 일격에 소탕해버림으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일본인들로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타격을 받은셈이였다. 《후두부를 꽝 하고 강타를 당한것 같다.》느니, 《천날동안 베여들인 새초를 한순간에 태워버린듯한 한을 남겼다.》느니 하는 당시의 군경 당사자들의 고백자체가 그것을 반증하고있었다.
세기와 더불어 2권 175쪽
4.1. 영향[편집]
이 사건이 영향력을 지니게 된 데는 동아일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사건 자체만 보면 민간인과 여아 1명이 희생된 해프닝에 가까운 사건이었는데 이를 대서특필하며 호외기사[11] 를 내보냈다. 총독부의 보도통제를 슬쩍 우회하는 편법을 썼기 때문이다. 항일세력을 '비적'으로 칭하는 총독부의 방침을 따르면서도 김일성이라는 누가 봐도 조선인의 이름을 중간 제목에 박아 버려 겉으로는 비적 떼라고 알리면서 조선인들에게 소멸된 줄 알았던 조선인 항일세력이 만주에 존재하고 잠깐이나마 한반도에 진입했다고 대문짝처럼 광고한 것이다. 1937년 6월 5일 동아일보 호외 기사
이 사건으로 김일성의 이름은 조선 전역에서 유명해졌다. 일제 말 삼천리 잡지에서 김일성의 행적 및 신원에 대해 직접 취재 및 주변인들 인터뷰까지 했을 정도였다.# # 결7호 작전을 위해 제주도에 파견된 육지인들이 섬 사람들에게 김일성에 대한 소문을 전해 주었다는 증언 채록도 존재한다. 해방 직후 중도우파 성향 잡지사 <선구>에서 창간기념으로 1945년 11월 여론조사를 하였는데 여기서 김일성이 군무부장에 1위로 조사된# 사례를 보더라도 김일성의 명성은 상당했다. 중도파 여운형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노선과 척을 진 김구도 이 사건에 주목했을 정도다. 당시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 폐간 이후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느라 금주, 금연하고 있었는데 보천보 전투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보천보 전투로 얻어진 김일성의 명성은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었다. 강대한 일제 치하에서 순응하던 조선인들에게 보천보를 일제 치하에서 탈환한 소위 김일성 장군에 대한 기대는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두만강을 건너며 축지법을 쓴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12] 까지 퍼질 정도로 대단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얻어진 명성을 발판으로 해방 후 쟁쟁한 빨치산 선배들을 제치고 북한을 장악했다.“… 7년 전(1943)에 나는 남선(南鮮)의 어떤 소학교 6학년생과 중학교 2학년생을 모아놓고 강연을 한 후, ‘제군은 현재 누가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정직하게,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무기명으로 투표해 보라’고 말하면서 안심을 시킨 후 투표해 본 결과 놀랍게도 그들 중 67%가 김일성이라고 쓰고 있다”(鎌田澤一郞(카마다 사와이치로), 『朝鮮新話』(조선신화) 2, 창원사, 1950, 384쪽).[출처]
다만 해방 직후 김일성의 모습이 나이와 같은 면에서 민중의 기대와 다른 것이 김일성 가짜설[13] 의 원인이기도 했으나 김일성은 지지자를 결집하는 조직력이 매우 뛰어나고 경력이 더 있는 이오시프 스탈린과 마찰이 있을 수 있는 다른 공산주의자나 친소파에 비해 가장 소련의 눈에 들고자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를 신뢰한 소련에 의해 지도자로 발탁되었다. 이에 1947년에도 조기천 등이 그가 직접 일본군을 물리친 것처럼 묘사하는 시를 쓰는 등 북한 내에서 공적을 부풀리는 시도가 있던 것은 사실이다. 휴전회담의 북한측 대표인 리상조가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이끈 것이 맞으나 이 전투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음[14] 을 소련에 알리려고 했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로 소련의 눈에 들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군 앞에서 이 공적을 과장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 심지어 김일성이 군무부장으로 뽑힌 설문에서조차 지도자를 묻는 설문에서는 박헌영과 이관술이 좌파 독립운동가 중에서 더 지지가 높았으며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김원봉, 이관술 등을 좌파 독립운동가 중에서 평가를 좋게 하고 있다.
5. 북한에서의 왜곡과 과대평가[편집]
북한에서는 김일성 우상화 차원에서 이 전투를 그야말로 신화로 포장한다.[15] 또 일본군 수천 명을 섬멸하고 골짜기마다 일본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는 보천보 신화를 떠든다. 북한 영화 <내가 본 나라>에는 하도 일본군이 많이 죽어서 시체를 호박이라 속여서 날랐다나 뭐라나. 물론 당연히 거짓된 우상화다. 모 탈북자는 자신이 탈북하기 전까지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200명도 못 되는 병력으로 수십만 대군을 격파한 대전투로 잘못 알았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과대평가된 부분은 김일성 본인도 저서에서 부정한 내용이다. 그렇지만 모든 북한의 예술작품은 김일성이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뒤에서 김일성 자신이 조장했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다. 특히 조기천처럼 황당한 과대평가를 한 사람은 김일성이 아주 좋아하기도 했다.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작품으로는 북한 시인 조기천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있다.
보천보 전투를 묘사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해 북한 정권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북한 정권 수립 전인 1947년에 썼는데 김일성이 조기천을 칭찬하고 서사시 창작 중 따로 면담도 하였으며 결국 북한에서 <시인 조기천>이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내용을 보면 어째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를 복붙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노래가 이 시에서 나온 게 맞다.(중략)
이는 이름만 들어도 / 삼도 왜적이 치 떠는 / 조선의 빨찌산 김 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 태산을 주름잡아 한 손에 넣고 /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 축지법을 쓴다고
(후략)- 조기천 <백두산>
‘간삼봉에 울린 아리랑’ 등의 노래로 우상화되기도 했다.
세기와 더불어 같은 김일성의 자서전에는 대단한 전투가 아니라는 듯한 김일성의 발언이 있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이 전투가 항일운동의 전부인 것마냥 여전히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 혜산시의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은 현재도 중요한 우상화 근거 기념물이며 보천보 전투 등에 동원된 부대로 중국공산당의 조직인 동북항일연군이 아니고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김일성이 직접 만들었다는 가짜 군대를 들면서 이 부대가 심지어 해방 당시 일본군까지 소탕하여 조국의 광복에 기여하였으며 그 부대는 현재의 북한군인 조선인민군이 되었다고 역사 왜곡을 한다.[16] 정확히는 아래처럼 묘사한다.
면사무소,우편국,산림보호구,소방회관을 비롯한 적통치기관들에서 삼단같은 불길이 솟구쳐올랐다.
정치공작원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작성하신 《포고》와 《조국광복회 10 대강령》[17]
을 거리에 불이고 선전물을 뿌리면서 정치사업을 하였다.(…)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18]
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그 의의는 일본놈들 몇명 죽인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주는 혁명의 서광을 비쳐준데 있습니다.》
보천보전투가 가지는 의의는 일본놈을 몇명 죽인데 있는것이 아니라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승 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준데 있다.
보천보에서 녹아난 일제는 참패를 만회해 보려고 부랴부랴 주변에 있는 수많은 군대와 경찰을 긁어모아가지고 조선인민혁명군[19]
주력부대를 추격해 왔다.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추격해오는 적들을 커우위수이산(구시산)과 지엔싼봉(간삼봉)에서 모조리 소탕해버리시였다.[20]
보천보전투후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가 커우위수이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뒤쫓아오리라는것을 미리 예견하시고 부대에 전투준비를 철저히 갖추게 하시였다.
얼마후 적들이 커우위수이산으로 공격해왔다.
(…)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밑에 고지에로 기여오르는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였다.[21]
이날 전투에서 겨우 살아 도망친 놈들은 200명정도밖에 안되였다.[22]
적들은 제놈들의 시체가 어찌나 많았던지 그대로 가져갈수 없어 대가리만 잘라 마대나 상자에 넣어 실어갔다.
그때 시체운반에 동원되였던 달구지군이 모르는척하고 일제놈에게 마대 안에 넣은것이 무엇인가고 묻자 호박이라고 대답하여《호박대가리》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 (중학교 제 4 학년용) p.81~82 , 2012년
6. 논란[편집]
김일성이 사장(지휘관)으로 있던 동북항일연군 2군 6사가 보천보를 공격하여 일부 전과를 올린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으나 실제로 김일성이 보천보 공격을 이끌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이견이 있다.
- 김일성 가짜설을 신봉하는 측에서는 김성주(김일성의 본명)와는 다른 '진짜' 김일성이 보천보 습격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매일신보》 등에 실린 김일성이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왔고, 보천보 전투 이후 1937년 11월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등의 기사다. 그 외에 만주국군의 월간지 《철심(鐵心)》에 실린 보천보 주민 인터뷰에서 지휘관이 약 40대로 보였다는 기사 등도 인용된다. 실제의 김일성(김성주)은 소련 유학 경력도 없는 20대에 이후까지 살아남았으니 이들이 지목하는 보천보 전투의 지휘관의 특징과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들 문헌들은 대개 김일성에 대한 신뢰할만한 정보가 극히 부족한 상태에서 일본군의 과장된 관제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 적었거나 목격자도 단정하기 어려운 정보[23] 를 실은 것들이다. 학계의 대다수는 이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 김성주가 2군 6사 사장 김일성이 맞다고 인정하지만 보천보 공격은 김일성이 아닌 다른 인물이 지휘했다는 주장도 있다. 유격대 특성상 가용한 병력을 지휘관과 참모장이 나눠서 이끌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보천보 공격 때는 2군 6사 참모장 왕줘저우(王作舟)가 이끄는 부대가 도강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당시 김일성은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작전을 펼치다가 보천보 전투 다음 날인 1937년 6월 5일에 왕줘저우 부대와 다시 합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펼친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는 자신이 중국 당국의 비밀 문건을 열람하고 여러 동북항일연군 출신자들을 인터뷰한 결과라고 이야기할 뿐 명확한 문헌적 근거(중국 당국의 공식/비공식 문건에 대한 서지정보)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역시 보천보 공격을 김일성이 지휘했다는 당대 문건이 매우 많은 상황에서 이를 뒤집을만한 근거로는 보기 어렵다.
7. 기타[편집]
- 야인시대의 22화[24] 중반에 악질 경찰 미와 경부와 그 부하들의 입을 통해 이 보천보 전투가 언급되는 부분이 짤막하게나마 등장한다. 미와 경부는 부하들에게 일의 경위를 듣고는 "이런 멍청한 것들…! 도대체가 그곳 경찰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칙쇼!! 칙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야…! 어떻게!!" 라고 펄펄 뛰며 분노하더니 고등계에 명령하여 비상령을 선포한다. 김일성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고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 부대'라고만 나온다.
- 한국 사회에서는 이 전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북한의 선전선동과 달리 실제로는 보잘것없는 전과,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장단체의 총책 역할을 했다는 김일성이 아예 자기의 부대가 있었는데 그 부대가 보천보 전투를 이끌고서는 심지어 1945년 8월에 일본군을 몰아내며 북한군이 되었다는 등의 과대선전을 통해 훗날 권력을 잡는 데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독립운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전투이고 한국사에서도 이 점을 짚고 간다.
- 김일성이 아닌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이나 조직원 중에는 해방 직전까지도 소련에 가지도 않고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경우도 있었다. # 만주에서 가장 늦게까지 일본에 저항하다가 전사한 허형식은 이육사의 〈광야〉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 #
- 국내의 지하조직을 통해 그날 저녁 주재소 경찰들이 다른 곳으로 발령을 받은 소장의 환송연을 벌여 술을 마시고 있을 것이라는 정보까지 파악하는 등 이미 상세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북항일연군 입장에서는 그리 큰 위험이 있는 작전이 아니었으며 사실 전과의 면에서 본다면 추격해온 일본 경찰대를 궤멸시킨 구시산전투나 일본군 74연대에 대승을 거둔 6월 30일의 간삼봉전투가 훨씬 더 큰 전과를 거둔 전투였다. 그렇지만 정치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유격대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유격대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 한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이자 독립군의 활동이 희미한 옛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에 일어났던 보천보 전투는 반세기가 넘게 한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일성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 1944년 11월 평양사단에 징집된 학병들이 탈출을 준비했을 때 그들의 목적지는 보천보였다. 불행히 실패로 끝난[25] 이 학병 탈출 사건의 지도부는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보천보로 가려고 했다는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조선의 대중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7.1. 신문[편집]
- 위 이미지는 1998년 10월 동아일보 취재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 측에 선물한 것으로, 동아일보의 보천보 전투 대서특필 호외보도(1937년 6월 5일)를 황금으로 뜬 금형이다. 원본은 평양의 김정일선물관[26] 에 있다. #
보천보 주재소를 습격하는 동시 다른 일대는 각지와의 전화선을 절단하고 우편소 면사무소 삼림보호구사무소 등에 방화하는 일방 약 백여 호의 촌락을 포위하고 약탈을 마음대로 하다가 한 시간만에 대안으로 도주한 사건이 돌발하야 보천보 촌락의 천여 명의 주민은 공포에 떨게한 소위 제이동흥사건[27] 을 일으키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8일자.
- 당시 일제 치하에서 신문이 김일성에 대해 다루려면 비적으로 취급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을 비적으로 규정한 당시의 신문 기사는 보천보 사건 한 해 전에도 존재했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1936년 10월 4일에 김일성이 40여 명과 함께 스류다오거우(十六道溝)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박흥룡이라는 조선인 농부의 집을 습격하여 소와 곡식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 밖에도 당시 김일성의 활동에 관한 보도들은 대부분 그를 비적으로 다루면서 그의 약탈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